[광복절 특집] 도산 안창호, 재림교회와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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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계몽과 조국독립에 헌신한 민족의 선각자 도산 안창호.
선생은 재림교회와 여러모로 연이 맞닿아 있다. 물론, 선교사업이나 신앙에 직접 관련돼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밟고 지나간 역사의 자리에는 재림교회의 흔적과 정신이 깃들어 있다. 그만큼 인연이 깊다.
도산은 한국 재림교회 초창기 4개 교회 중 하나인 강대모루교회 개척자이자 진남포 여학교에서 교사로 봉사한 이석관 장로의 맏사위다. 이 장로는 한국 의료선교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George Russel(한국명 노설) 박사의 곁에서 그를 돕기도 했다.
도산은 이석관 장로의 장녀 이혜란 여사와 1902년 결혼해 일생을 보냈다. 두 사람은 8살의 나이 차가 났다.
도산과 여사가 해로하게 된 이야기는 흥미롭다. 당시 이석관 장로는 동네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는데, 그러다 보니 누가 똑똑하고 총명한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안창호는 공부도 잘하는 데다 사리 분별이 뛰어나고, 남을 도와주는 덕성과 인도자의 자격이 충분한 것을 눈여겨보고 일찌감치 사윗감으로 찍어두었다는 것이다.
둘째 사위는 도산의 동서이자 주치의였던 김창세 박사다. 1925년 미국 존스홉킨스대 보건대학원에서 한국인 최초로 보건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천재 의학자다. 일제강점기 속에도 공중보건을 비롯한 세균학 및 위생학 등의 씨앗을 뿌린 우리나라 의학계의 선구자다. 한국과 중국, 미국 등에서 인정받는 의사였지만, 개인적 안일보다는 의술을 통한 독립이라는 공익적 가치에 삶을 헌신한 유공자다.
도산은 한국 재림교회 기초를 놓은 근당 임기반과 동향 친척이기도 하다. 도산의 고향 강서와 근당의 고향 용강은 서로 이웃한 동네였다. 집안이 가난했던 도산은 한때 근당의 집에서 숙식하기도 했다. 도산보다 10년 연상이었던 근당이 안창호 선생과 이혜란 여사 사이에서 중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은 독립협회를 비롯해 하와이에서의 민족계몽운동, 신민회 조직, 국채보상운동, 조선독립청년단 조직 및 독립자금 모금 등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함께 펼친 동지이기도 했다. 이를 통해 당시 재림교회와 구성원이 민족의 고난과 역사 속에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배경 때문인지 도산에게서 재림교회의 사상적 편린이 엿보인다.
1910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하고 있을 때 그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항상 몸이 나랏일에 매여 가사를 돌아보지 못하므로 ... 장차 아이를 교육할 힘이 없을까 염려하나이다. ... 나라를 위하여 고생하고 죽는 것은 조금도 염려할 것이 없거니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어린 자식을 교육하지 못함을...”이라고 적고 있다.
독립운동에 전념하여 아비로서 자식에 대한 직무를 다하지 못하는 절절한 심정을 고백하는 편지에서 기독교적 사상이 드러난다.
도산은 “나는 교육자로서 일생을 바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을 만큼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이자 위대한 교육가였다. 1899년 22세의 나이에 고향에 최초의 사립 남녀공학인 점진학교를 설립하고, 1904년에는 재림교회와 기관이 중심된 리버사이드에 한국어학교를 세웠다. 1907년에는 미국에서 돌아와 대성학교를 세우고 초대 교장이 되었다.
1913년에는 흥사단을 창립하고 덕육, 체육, 지육 등 ‘삼육’을 기본교육 철학으로 삼았다. 재림교회의 교육이념인 삼육교육을 전수한 것이다. 임기반이 초석을 놓은 의명학교(현 삼육대학교)의 교육이념도 지덕체 ‘삼육’이었다. 흥사단을 조직할 때, 민족 기풍을 혁신하고 건전한 인격을 창출할 근본으로 기초를 놓은 것이 바로 삼육이념이다. 도산의 직업교육 강조도 의명학교의 실업교육 과정과 유사하다.
재림교인과의 인연도 깊다. 특히 동서 김창세 박사와는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김창세 박사는 1920년 3월 11일 흥사단에 입단했다. 임시정부 기관인 대학적십자회가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했을 때는 교수로 참여하기도 했다. 1920년대 후반 상해임시정부청사의 임대료를 지원하는 등 여러 모양으로 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했다.
주요한이 편저한 <안도산 전서>에 따르면 김창세 박사가 상해 재림교회 홍적십자병원에서 근무하던 때에는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흥사단과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이곳을 자주 출입했다.
얼마 전 개원 70주년을 맞은 부산 ‘매실보육원’의 설립자 최매실 여사는 안창호 선생에게 독립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는 잠들기까지 재림교회를 사랑했고, 재림교인들을 사랑했다. 또한 재림교회 기관과 학교, 병원과 간호사를 찾았다.
주요한의 <안도산전집> 485쪽에서 도산은 숨을 거두기 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소. 그렇게 원한다니 순안 안식교의 제품인 포도즙은 진정품인데 안국동 남계양행에서 파니 용기까지 가져오면 한번 시음하겠소”
임종 시 도산을 간호하던 재림교인 간호사는 마지막으로 순안에서 마셨던 포도즙을 찾아 대접했다.
지성인으로 시대정신을 밝혔던 선각자가 사랑했던 교회. 민족의 고난과 역사 속에 함께 했던 교회. 이제 역사의 유산을 오늘에 되살려 실천한다.
광복절 아침. 마지막 숨을 쉬는 그 순간까지 이어졌던 도산과 재림교회와의 인연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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